고백합니다.
청년 노동자의 죽음, 채 하루도 되지 않았던 어제, 디케이 정문 앞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류를 나르기 위해 대형 화물차들이 오가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25세 청년이 죽었는데’... 그 화물차를 막아보고 싶고 호소하고 싶었지만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나누지 못해 죄송합니다.
25세의 청년노동자의 죽음 이후에 추모해야만 하는 마음은 너무도 분노스럽습니다.
또다시 언제 어느 누가 죽어야만 하는지 공포스럽습니다.
당신의 청춘을 잇기 위해 우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청년 노동자의 희망을 키우고 품기에 아직 민주노총이 다하지 못함에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처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기업의 이윤 때문에 소중하고 소중한, 귀하디 귀한 청년의 생명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야만 합니까.
디케이는 삼성전자 협력업체로 지난해 기준 매출 2,152억원, 직원 773명으로 둔 광주의 대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라 포장되어 최저임금을 받고 있으며 힘들어 지쳐 일하고 또 일해도 명절조차 제 맘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열악한 공장의 바닥은 노동자들의 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은 노동자의 고통이 쌓이고 쌓여가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방문한 디케이. 이재용 회장은 ‘협력사가 잘돼야 우리 회사도 잘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원들과 사진을 찍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은 이재용 회장의 방문 때문에 전 직원이 동원되어 며칠째 회사 전체를 페인트칠해야만 했습니다.
이재용 회장이 방문한 그 시간, 노동자 안전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했더라면, 사진 찍을 시간에 노동자에게 다가가 ‘무엇이 힘든지’ 단 한마디라도 물었더라면 25세 청년노동자가 우리 곁을 이렇게 떠났을까요?
희생된 노동자가 형과 나눈 어리광 가득한 글은 유서와도 같았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가고 아픈 몸으로 쉬지 못하고 일하며 며칠째 한 사람만을 위한 페인트칠을 해야만 하는 동생의 푸념은 희생된 이 청년 노동자만의 고통이 아닙니다. 바로 이 나라 현실에 어찌할 바 모르고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야 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청년들의 고통입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기 위해 국회를 쫓아다니고 집회하고 시민들을 만나 아스팔트에서 기나긴 투쟁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력화시키려는 윤석열정부와 재벌, 기업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죽고 또 죽어가야만 하는 이 행렬에 정부는 없습니다.
최근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3분기 재해조사 대상 사고 사망은 510명입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되고 시행 첫해 2분기까지 미약하나마 감소세를 보였지만 전년 대비 8명이 증가하였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개악 등 무력화 정책에 힘입어 안전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들의 안이함은 사망자 증가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기업의 자율안전’을 강조하는 노동부의 인식과 태도는 윤석열 정부의 ‘자율안전 중심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으로 가시화될 것이며 노동자 죽음의 행렬은 계속될 것입니다.
광주광역시와 광주지방고용노동청에 제안합니다.
광주지역 노동시민사회단체는 부족하지만 ‘중대재해 없는 광주만들기’를 위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광주광역시와 광주지방고용노동청에도 제안한바 있습니다.
민주노총광주본부와 현대산업개발 퇴출 및 학동·화정동 참사 시민대책위는 2020년 김재순 청년 노동자의 죽음과 광주지역 참사를 겪으며 지난 8월 광주광역시와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이 참가한 ‘중대재해없는 광주만들기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형식적인 관리감독이 아닌 중대재해를 실질적으로 줄이기 위한 절절한 호소의 발제와 토론이었습니다. 참가자 모두는 중대재해 예방부터 재발 방지 대책까지 시민·노동자·전문가와 함께 참여해 논의하고 실행해 나가는 공동행동이 필요함을 인식했습니다. 자, 이제 ‘안전 컨트럴타워’인 광주광역시가 나서야 합니다. 늦었지만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중대재해 없는 광주만들기를 시작합시다.
시민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한 가장 큰 힘은 노동자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광주시민의 힘입니다. 인간은 시키면 시킨 대로 일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죽지 않고 일할 권리,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 그리고 노조할 권리가 있습니다. 유가족분들이 가장 후회하고 한탄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가족, 친구, 지인에게 ‘조금만 참아라’, ‘참으면 나아지겠지’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는 한탄이셨습니다. 감히 호소드립니다. 당장 민주노총과 이야기 나누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합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그나마 편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노동자는 하나가 열이 될 때 비로소 작은 권리라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청년 노동자의 죽음 앞에 이렇게 요구합니다.
- 디케이 경영책임자에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적용하라.
- 광주지방고용노동청과 경찰청은 사고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은 디케이를 당장 압수수색하고 특별근로감독 실시하라.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 디케이 대표이사는 유가족과 광주시민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공개하라.
- 윤석열정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무력화 시도를 당장 중단하라.
- 광주지방고용노동청과 광주광역시는 중대재해를 실질적으로 줄이기 위한 ‘중대재해없는 안전한 광주만들기’에 대한 제안에 답하라.
2022.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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