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지난 7일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내렸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청구권 협정은 불법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한 협정이 아니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일본이 협상 과정에서도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 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2005년 제기된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가 양승태 대법원과 재판 거래를 한 사법농단의 상징적 사건이 되기도 했고,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기까지는 장장 13년 8개월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처럼 심사숙고해 내린 사법적 결론에 대해, 김양호 재판부는 별다른 새로운 논리 전개도 없이, 3년도 안 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군함도’에 탄광을 운영했던 미쓰비시머트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은 2015년 이 섬에 끌려간 미군 포로들에게 찾아가 사과한 뒤, 이어 2016년 중국인 피해자 3,765명에 대해 사죄와 함께 배상한 바 있다. 반면 같은 시기, 같은 현장에 끌려가 혹사당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사과 한마디도 배상금 한 푼도 없었다. “한국은 법적 문제가 다르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한 나라였고, 조선인은 일본 국민으로도 동원된 것”이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해명이었다. 즉, 사과할 이유도 배상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 인식은 1965년 한일회담에서도 그대로 관철돼, 한일청구권협정 어느 페이지에도 ‘불법’이나 ‘피해’, ‘사죄’나 ‘배상’ 한 줄이 적혀 있지 않다.
내막이 이러한데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에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일본정부의 기존 주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부정하고 사법 주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분개하는 것은 단지 피해자에 불리한 결과여서가 아니다. 판결문 내용만 살펴보면 과연 어느 나라에서 나온 판결문인지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혹여 일본정부나 피고인 전범기업이 판결문을 대신 써 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배, 징용의 불법성은 단지 국내법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이번 소송을 넘어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한일병합은 불법이 아니므로, 역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불법단체가 되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맞선 항일 독립운동가는 불법단체에 가담한 테러리스트라도 된다는 것인가?
“일본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였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이 인정된 자료가 없다”며,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의 약소국 병합이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국제사회에 실정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주장엔 말문이 막힐 정도다.
자료가 없으니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 아니라는 것인가? 다른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한일병탄이 합법이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그러면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 주인 없는 분쟁 도서라는 말인가? 이런 자가 진정 국민의 혈세로 밥을 먹는 대한민국 판사라는 것이 혀를 내두를 일이다.
또한 “대한민국이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세계 경제사에 기록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는 주장은 자국민에 대한 심대한 모독이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국민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준 돈 때문에 이뤄졌다는 주장은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보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궤를 같이하는 망언에 가깝다.
이번 판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재판의 본질이나 법률적 근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본인만의 상상력과 집착을 끌어와 판결을 선고했다는 점에 있다. 사법부의 본분을 넘어, 마치 대한민국의 안위가 본인 손에 있는 것처럼 외교문제까지 억지로 끌어 쓰는 과도한 자기 착각과 망상에 빠져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는 반면, 반대로 일본 등 주변국을 과대평가하는 철저히 사대와 굴종으로 내면화된 의식체계를 전혀 부끄러움 없이 엿보이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가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는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져 헌법상의 ‘안전보장’을 훼손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한미동맹과 무슨 상관이며, 안전보장을 훼손한다는 것은 또 무슨 근거인가? 피해자들의 아픔을 국가가 보듬어야 위신이 제대로 서지. 한미동맹을 이유로, 안전보장을 이유로 국민을 내팽개치라는 말인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가 인용되어 강제집행이 이루어지면 국제적으로 역효과가 초래된다’고 한 것은, 국가 이익을 빙자해 국민 개개인이 가지는 권리는 얼마든지 무시되어도 된다는 것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판결 이행을 거부하고 있는 일본 기업, 더불어 “한국이 해결책을 내야 한다”는 적반하장 주장에 손뼉을 마주쳐 준 꼴이다. 말 그대로 일본정부는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떡이라도 돌린 판이다.
거듭 밝히지만 이번 판결은 한 판사의 양심적 소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한 일탈 그 자체다.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반민족적, 반헌법적인 이번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 아울러 사대 굴종에 찌들어 있는 사법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 피해자 내팽긴 채 강대국에 굴종하는 사법적폐 청산하자!
- 한일병합이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냐? 친일적폐 청산하자!
- 일제총독부 경성지국 판결이냐? 김양호 판사 탄핵하자!
2021년 6월 9일
(사)광주전남겨레하나,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 (재)누리문화재단, 4.19문화원, 광주기독교연합회 인권위원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광주시민센터,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광주여성노동자회, 광주전남대학민주동우회협의회, 광주전남시민행동,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광주전남추모연대, 광주지구J·C청년포럼, 광주진보연대,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광주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국민티비광주협의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기청 전국 동지회, 마을발전소, 민족문제연구소광주지부, 민주노총광주본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광주전남지부, 사단법인우리민족, 생명존중연구소, 생활정치발전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광주전남지부, 오월광장, 전교조광주지부, 정의당광주광역시당, 진보당광주광역시당, 진정한광복을바라는시민의모임, 참여자치21. (가나다순, 이상 정당 포함 35개 단체)
댓글